이국종이 존경한 인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

다들, 이국종 교수에 대해서는 흔하게 들어보고 국내 외상의학의 권위자로 알고 있을것이다.

(다만 이국종 교수는 2020년부터 교수직을 제외한 모든 외상외과 관련직에서 사임했다. 현재 센터장은 제자인 정경원)

현재의 권역외상시스템을 수립하기 위해 큰 노력을 들였고

현재 전국에서 각 권역별로 외상센터가 설립되고, 외상외과가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국종 말고도 이런 인물이 하나 더 있었으니

오늘 다뤄볼 前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윤한덕 박사이다.

윤한덕은 1968년 해남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나만 넷이었다.)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윤한덕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며

광주로 이사하게 된다.

1983년에는 전남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고였던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분해해 조립하는 등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상당히 학업 성적이 좋아 본인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가길 원했었지만…

그러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아까 말한)누나들도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던지라

‘집안에 의사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본인이 진학을 원하지도 않았고, 의대 공부에 큰 뜻이 없었던 윤한덕은

재학중 휴학을 하거나, 의대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윤한덕의 일생을 다룬 의사 윤한덕 1편에서 자세히 나온다)

(상당히 호방..한 성격이라 의과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이 오리걸음 기합을 주자 왜 이걸 해야 하냐며 들고 일어난 적도 있었다.)

어찌저찌 본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응급실 인턴으로 있었던 윤한덕은

당시 응급실에서 수많은 막을수 있는 죽음을 보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그리고 윤한덕이 큰 마음을 먹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차에 깔려 응급실에 실려온 어린 아이를 살리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응급의료 체계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지역에서 제일 큰 병원이었던 전남대병원으로 무조건 응급환자를 보냈었고, 환자가 계속 한곳에 몰리고, 몰린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보내는 루틴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전문의의 미비’로 인해 어린 생명은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어린 생명을 잃게 된 윤한덕은 응급의료체계를 꼭 개선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계기가 되어 1995년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발이 시작되었고, 1998년 군 복무를 마친 윤한덕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들어가게 된다.

2002년에는 중앙응급의료센터 응급의료기획팀장에 선임되어 행정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는 통합되고 전산으로 관리되는 응급의료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였고, 직접 컴퓨터를 만져가며 체계를 짰다.

그렇게 해서 2003년, 전국의 응급의료기관으로부터 전송되는 진료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는 시스템인 국가응급의료진료망(NEDIS)의 등록이 시작된다. 응급의료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었을 때, 환자 동선이나 환자 데이터를 분석한 국가응급진료정보망을 직접 기획하고 개발, 구축한것이다.

이 시스템으로 각 병원에서 제공되는 실시간 응급의료 정보가 통합되어,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119 구급대가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또 재난현장의 응급의료체계를 확립하고, 2003년부터 응급의료기관 평가제도를 매년마다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윤한덕은 응급의료전용헬기 사업에 매진했는데, 2011년부터 일명 닥터헬기라고 불리는 응급의료 전용헬기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업적을 쌓은 그는 2012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에 취임했다. (사진 제일 왼쪽, 유일하게 남아있는 12년도 사진)

2015년 5월 20일에 질병관리본부가 메르스 1번 환자를 국립중앙의료원에 전원했을 때, 윤한덕은 메르스 대응 및 기획반장으로 메르스 사태를 총괄 지휘했다.

메르스 균을 차단할 수 있는 음압 병상과 음압 구급차를 구상, 만들었고.

그 결과 의료원에 감염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이 메르스 중앙거점 의료기관으로 지정된 이후 총 67명의 환자를 단 한 명의 추가 감염 없이 진료했다.

(사진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

전국에 17개 권역외상센터를 설치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응급의료종사자 전문화 교육에 앞장섰다.

권역외상센터 설치와 닥터헬기 도입으로 인해

예방 가능한 사망률은 2015년 30.5%, 2017년 19.9%, 2019년 15.7%를 기록했다.

윤한덕의 꿈이었던 ‘예방 가능한 사망’의 감소가 지표로써 실천된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했다.

윤한덕은 2019년 설 연휴 기간이던 2월 4일 국립중앙의료원 자신의 집무실에서 책상 앞에 앉은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나이 만 51세였다. ‘업무상 과로사’로 판명된 고인의 책상 위에는 ‘지역외상체계 태스크포스(TF)’의 거버넌스 조직도가 놓여 있었다. 병원 하나만으로는 빠른 응급의료체계를 만들 수 없기에 윤 센터장은 의료기관과 소방기관, 지자체가 협업하는 완벽한 ‘지역화 응급의료체계’를 꿈꿨다.

응급의료센터뿐만 아니라 재난응급의료상황실 업무에도 관심이 많았던 윤 센터장은 응급의료체계 발전을 고민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이 거의 없었다. 주말 밤에 퇴근해 월요일 새벽에 출근하는 때가 잦았다.

윤 전 센터장은 숨지기 전 일주일간 129시간 30분을 일했고, 3달 동안은 평균 118시간 42분을 일했다.

만성 과로 인정 기준은 그 절반 정도인 주 60시간이다.

그의 또다른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본인이 자문한 어린이용 만화책과 닥터헬기 모형이 놓여있었다.

– 이국종과 윤한덕 –

2008년 겨울, 이국종 교수가 윤 센터장을 찾아갔을 때 윤 센터장은 이 교수에게 “지금 이국종 선생이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 아주대학교병원에 중증외상환자가 갑자기 오면 누가 수술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이국종 교수는 “그가 나를 보자마자 던진 질문의 함의는 선명했다. ‘외상 외과를 한다는 놈이 밖에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은 환자를 팽개쳐놓고 와 있다는 말 아니냐? 그게 아니면 환자는 보지도 않으면서 보는 것처럼 말하고 무슨 정책 사업이라도 하나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였다”고 썼다.

이국종 교수는 “그는 내내 냉소적이었으며 나를 조목조목 비꼬았다. 그럼에도 나는 신기하게도 그에게서 진정성을 느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외상센터 관련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 시기에 그를 종종 보았다”고 했다.

이어 “내가 본 윤한덕은 수많은 장애 요소에도 평정심을 잘 유지하여 나아갔고, 관계에서의 출세에는 무심한 채 응급의료 업무만을 보고 걸어왔다”고 덧붙였다.

응급의료 발전이라는 사명감 때문에

하루 19시간을 지독하게 일하고

집에 머문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3시간

남루한 간이침대에서 1년 내내 선잠을 자며

25년 동안 응급환자를 위해 일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꾹 누르고 살았다.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윤한덕은 자신의 했던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외부로 노출되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저 일만 묵묵히 하면 될 뿐이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환자가 돈이 있든 없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신속하게 적절한 병원으로 옮겨져 제대로 치료받기만을 바랐다. 환자를 위한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한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국종 교수의 책 골든아워에서 「윤한덕」이라는 챕터를 통해 약간 알려졌을 뿐이다. 이국종 교수는 윤한덕을 응급의료의 책임자이고, 일신의 영달을 마다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윤한덕은 자신을 과대 포장한 것이라며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자신의 존재를 누가 알아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의사로서의 사명이 더 중요했다.

정작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 형제들도 윤한덕이 응급의료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몰랐다. 그의 사후, 언론을 통해 그토록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윤한덕이 없었다면 응급의료는 예전과 비슷했을 것

그는 응급의료체계 구축이라는 멍에를 온몸으로 떠받친 아틀라스

이국종 교수는 윤한덕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 전체를 들어 올려 거꾸로 흔들어 털어 보아도, 선생님과 같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두려움 없이 헤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윤 센터장은 중앙응급의료센터장으로서 한결같이 우리나라 응급의료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응급의료기관평가, 국가응급진료정보망 구축, 응급의료 전용 헬기 도입 등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선도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진정한 리더” – 대한응급의학회 성명 中 –

“병원에서 실수하면 몇 명이 죽지만 우리가 실수하면 몇백, 몇천명의 국민이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던 센터장님의 말씀과 웃음이 그립다” – 윤순영 재난응급의료 상황실장 –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던 그가 가장 바라던 것은 응급실에서 중증의 환자들이 기다리지 않고 제때 치료받게 하는 것이었다” –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허탁 –

그리고 그는 2019년 4월 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8월 13일 정부는 응급의료정책 발전에 힘써온 그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응급환자가 제 때 치료받는 세상을 소원했던 윤한덕.

그는 마지막까지도 환자를 위하다 떠났다.